죽음의 모양이 다른 두 사회

작성: 이준엽 | 게시: 2022-05-20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죽음이 있다. 하나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 끝에 찾아오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더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이들의 침묵된 퇴장이다.

우리는 흔히 아프가니스탄을 비극의 나라로 인식한다. 기자의 앵글을 통해 투영된 굶주린 아이들의 눈망울, 싸움과 재해로 무너진 병원, 외부 지원 없이는 하루를 버티기 어려운 현실이 그것이다. 실제로 인구의 55% 정도가 국제 빈곤선 이하의 상태이며, 100만 명이 넘는 어린이가 영양실조에 시달린다는 유엔의 보고서도 있다. 그들에게 삶은 매 순간 죽음과의 싸움이고, 그 싸움은 언제나 절박하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오늘 하루를 버텨내고, 내일을 기약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붙잡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들의 어려움은 잘못 구조된 사회가 개인을 버린 결과이지만, 그게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생의 끝은 결코 아닌 것이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은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한 사회지만, 국제보건기구 추정으로는 인구 10만 명당 약 3~5건 정도의 자살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국이라는 현실에 거주한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력, 최첨단 의료 시스템, 안정된 교육 제도와 치안이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갖춘 사회의 이면에는, 하루 평균 38명(23년 기준)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현실이 놓여 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는 그저 경고일 뿐이고, 아무도 그 경고등을 해제하려 나서지 않는 외눈박이 현실이다. 누구도 굶어 죽지 않을 것 같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미명은 너무 많은 이들을 스스로 굶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죽음은 조용하다. 병원 문턱 앞에서 돌아서는 저소득층, 다달이 밀리는 고지서를 붙잡고 숨을 고르는 청년, ‘홀로’라는 말이 곧 사회적 질병 명칭이 되는 고독한 중년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누구에게도 구조를 요청하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통받고, 한국에서는 삶이 두려워 죽음을 선택하는 현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생존이 목적이지만, 한국에서는 생존이 짐인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말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잘 살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충분히 잘 살고 있는 사회에서 왜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죽음을 선택하고, 왜 ‘실패’로 규정된 삶이 늘고 있는가?

2023년 정부의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만이 유일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는 답변 비율이 2018년 답변 때보다 6.2% 증가한 31.2%라고 한다. 우리는 정말 이전보다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높은 자살률은 상대적 박탈감의 극단적 표현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조적 문제임을 거부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논의가 필요 없다는 말은 곤란하다.

한국은 법으로 사회주의로의 진행을 막고 있다. 즉 선택의 수단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강제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로의 진행에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을 국가가 차단한 것이니,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한다. 높은 자살률이 결코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죽음을 부르는 현재의 좀비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라는 주제여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는 우리가 아프가니스탄보다 나은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