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타인을 지배하는 방식의 변화를 통해 진화해 왔다. 고대 중국에는 신분 과시를 위해 인육을 소비하는 문화가 존재했고, 시간이 흐르며 생명을 소비하는 행위는 점차 은밀해졌다. 그러한 행태 중 하나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의 악습, 바차바지(Bacha Bazi)였다. 어린 소년을 여성처럼 꾸며 춤추게 하고, 부유층의 성적 유희 도구로 삼았던 이 제도는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가장 극단적 형식의 발전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과시를 위해 인간을 소유하지 않는다. 대신 명품과 부를 통해 권력을 과시한다.
필자의 지인이 장작구이 고기를 판매하는 지역의 규모가 큰 식당에 취업했다가 겪은 일화는 그런 사실을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맡은 업무가 주차장 한 켠의 작업장에서 장작패기였는데, 취업 며칠 후 고급 승용차에서 개와 함께 내린 여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한다. 그 다음 날 주방에서 닭을 굽는 일의 책임자인 이가 와 말하길, 그 여자가 식당 주인의 부인이라고 설명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 여자(사장의 부인)가 왔다 갔고, 다시 며칠 후 지인은 해고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 참. 나이도 드신 분이 말귀를 못알아 들으시네. 그 분이 사모님이라고요."
겉보기에는 인권이 진보한 듯 보이지만, 돈으로 구축된 현대 사회는 은밀한 형태의 억압 구조를 만들어냈다. 신분 과시의 방법이 바뀌었을 뿐, 바차바지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봉건 사회에서 부유층은 ‘인간’을 직접 소유하며 자신의 지위를 드러냈다. 바차바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소년은 성적 대상이자 부의 계급 상징이었다. 현대 사회는 명품과 브랜드를 통해 신분을 과시하며, 인간을 직접 소유하는 방식에서 벗어난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인 지배 구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신분 과시는 특정인을 소유하는 방식이 아닌, 돈과 브랜드를 통한 간접적인 과시로 전환됐지만, 지배하지 못하는 질서에 대한 반발은 외면과 배제로 응징되고 있다. 과거 봉건적 사회에서는 착취의 대상이라도 일정 수준의 생존이 보장됐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돌봄마저 자격 증명을 요구 받는다.
"사지가 멀쩡한데 왜 돌봄이 필요하지?"
‘쓸모없는 존재’
바차바지 시대의 왜곡된 가치관은 부의 권력 과시가 주 목적이다. 상품인 소년은 잉여된 부를 과시하는 사치의 수단이었다. 소년이 청년이 되면 다른 용도로 전환되는 것이지, 폐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자본주의는 효율을 극대화하며, 그 흐름에서 제외된 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다른 쓰임이 없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사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 절망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살기 좋아졌다는 말이 중첩되는 만큼 자살률도 높아졌고, 경제적 이유로 생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수는 과거보다 훨씬 많아졌다. 바차바지라는 인간 매매제도가 존재하던 시대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삶에서 내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자아의 고립을 유발하고 있다.
바차바지가 더 인간적인 구조였을까?
물론 바차바지는 인간에 대한 잔혹한 착취였으며,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에는 착취당하는 이들조차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반면 현재의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와 경제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불필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인간 생명에 대한 직접 사유화가 제도적으로 사라진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면, 왜 더 많은 사람들이 고립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과연 과거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더욱 은밀하고 차가운 형태의 잔혹함을 만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