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차바지: 인간의 타락한 욕망인가, 신분 과시의 극단인가?

작성: 이준엽 | 게시: 2025-05-20

신분 과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 사회를 지배해온 본능 중 하나다. 과거에는 황금으로 치장된 갑옷과 웅장한 궁전이 이를 상징했고, 오늘날에는 최고급 명품과 고급 스포츠카와 고급 아파트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1868년 바차바지를 그린 그림
Bacha and his admirers.Vasily Vereshchagin.Painting 1868.

그러나 멀지 않은 과거의 시대, 그 과시 욕망의 극단을 차지한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에서 오랜 세월 지속된 악습, 바차바지(Bacha Bazi)다. 어린 남자아이를 여성처럼 치장해 춤추게 하고, 부유층의 성적 유희 대상으로 삼았던 이 관행은 과연 타락한 욕망의 발현일까, 아니면 신분 과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까?

권력은 욕망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종종 욕망이 억압될 때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권력과 신분이 결합하면, 욕망은 때때로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고 묵인된다. 바차바지는 그런 사례 중 하나다. 어린 소년을 여성처럼 꾸미는 행위는 단순한 문화적 취향이 아니라, 신분 과시의 변형된 양상이었다. 부유한 자가 되면 단순히 물질을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부유함으로 복종을 얻고 싶어 한다.

이러한 심리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정판 백을 들고, 최고급 시계를 찬 손목을 흔들며 남에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소유가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그 물건의 범위에 인간이 자연스럽게 포함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차바지와 명품: 같은 욕망, 다른 형태

현대 사회에서 명품 소비는 단순한 구매 행위를 넘어,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상징이 됐다. 그것은 바차바지를 통해 소년을 ‘소유’하던 행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명품으로 전환된 소유 권력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대신에,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경계를 선명하게 하는 도구인 것에서 바차바지 시대와 다를 바 없다.

바차바지 시대의 소년과 현대의 명품 모두, 그 가치의 척도는 그 물건을 선택한 자의 욕망에 주둔하는 권력에서 비롯된다.

욕망으로 박제된 명품 가방을 들고 거리를 걷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행위다. 그것은 바차바지 시대에 남들 앞에서 소유물인 소년을 여장시켜 춤추게 한 것과 동일한 과시인 것이다. 욕망의 표출 방법만 바뀌었을 뿐, 본질적으로 같은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과시는 본능인가, 타락인가?

만약 바차바지가 단순한 소아성애적 일탈이었다면, 그것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사회적으로 묵인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구조적인 문제였다. 우리는 이런 과거를 ‘야만적’이라 비난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오늘날에도 같은 심리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은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과시는 누군가를 소비하거나 착취하고 싶은 유혹으로 번진다. 과거에는 '소년상품' 바차바지를 통해 신분을 과시했고, 오늘날에는 명품 소비를 통해 층위를 드러낸다. 결국 바차바지는 단순히 타락한 욕망의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의 계층적 자연화가 빚은 불가피한 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 달라졌는가?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더 문명화되고 윤리적으로 진보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과연 신뢰할만큼 정당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더 이상 인간을 명품처럼 취급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신분을 과시하고 사회적 계층을 유지하려는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바차바지와 오늘날의 명품 소비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간 심리에서 비롯됐다. 내 손에 들린 명품 백은 새로운 형태의 바차바지는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