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이준엽 | 게시: 2025년 5월 16일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포퓰리즘이다. 복지 정책을 중심으로 표심을 잡으려는 후보에 대해 정치적 상대는 국가 재정을 위협하는 공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한다. 그 표현은 점차 확산되어 ‘무책임’, ‘감성팔이’라는 조롱으로 이어지며, 정책 그 자체의 내용을 논의하기보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본래 포퓰리즘은 복잡한 민주주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긴장 구조였지만, 지금은 정치적 무기로 전락한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포퓰리즘 공격’이 무분별하게 반복될 경우, 그 끝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복지 정책에 대한 공격은 곧 ‘왜 내 세금을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쓰느냐’는 주장으로 비약되고, 급기야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은 더 많은 투표권을 가져야 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의 투표권은 제한해야 한다’는 반민주적이고 반인륜적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른바 '유권자 자격제'라는 위험한 논리가 지지층의 입을 통해 공공연히 회자되기 시작한 일부 국가들의 사례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고속철도나 지역 공항 같은 대형 인프라 건설은 어떠한가? 실상 많은 국민들이 평생 두세 번밖에 이용하지 않을 수 있는 고속철도에 수조 원이 투입된다. 공항 또한 비슷한 구조다. 빌전이라고 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발전이니 역시 포퓰리즘이다.
지금처럼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오직 복지 정책에만 적용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에만 날을 세우는 구조는 사실상 ‘투자 우선주의’에 편승한 이중 잣대일 뿐이다. 만약 복지가 필요하지 않은 정치를 원한다면, 굳이 정치인을 뽑을 필요가 없고, 정치는 기술 원리에 의해 AI가 주도하는 대로 맡기면 된다.
복지와 관련된 제반 문제에서 그 정당성과 타당성이 의심되면 공개적 토론과 검증을 통해 판단받아야 하는 것이지, 논의 자체를 비난하는 태도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투자만 해야 한다는 '엘리트 포퓰리즘'이라고 봐야 한다. 포퓰리즘에 대한 일방적인 낙인찍기는 정책에 대한 건전한 논쟁을 막고,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포퓰리즘 공격의 정치적 도구화가 민주주의 위기로 이어진 사례들이 있다. 미국에서는 복지 정책 확대를 ‘게으른 자들을 위한 시혜’로 폄훼하는 보수 진영의 주장 속에서, 저소득층의 의료 혜택이나 주거 지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크게 흔들렸다. 이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고, 반대로 대형 인프라 투자와 군사비 확대는 ‘국가 안보’ 또는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면죄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에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고속철에 대한 투자일 수 있고, 관점을 바꾸면 그런 지출 역시 명백한 포퓰리즘이다.
헝가리나 폴란드에서는 포퓰리즘 프레임이 극우 세력의 무기화로 이어졌고, '진짜 국민 vs 가짜 국민' 구도가 고착화되며 자유 언론과 소수자 인권이 위협받고 있다. 결국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국민을 나누는 도구가 되면, 정치는 더 이상 공동체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닌 특정 계층의 이익 대변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우선, 언론과 학계, 시민사회는 ‘포퓰리즘’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 그 맥락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과연 그것이 국가 재정에 실질적인 부담을 주는가? 아니면 정치적 프레임에 의한 공격인가? 이 구분이 선행되지 않으면 공공정책에 대한 편견과 혐오만 확산될 뿐이다.
둘째, 정치권은 자신들의 공약을 수치와 근거를 통해 국민에게 설명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책의 방향성과 장기 효과, 재정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상대의 공약에 대해서는 비난이 아닌 대안 제시로 대응해야 한다.
셋째, 유권자 역시 정책의 겉모습이 아닌 실질적 내용을 판단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당과 후보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대표자이지, 도박판에서 표를 따내기 위한 기술자가 아니다.
또 하나의 살필 내용은, 이처럼 위험한 결과를 알면서도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정치적 도구로 삼는 경우와, 그 개념의 복잡성이나 민주주의적 함의를 모른 채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경우, 사회에 미치는 파괴력이 다르다는 것이다.
첫째, 알면서 사용하는 경우는 대중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해 정책 논쟁을 피하고, 상대를 도덕적으로 실격시키려는 전략이다. 이는 사회 구성원을 '세금 내는 책임 있는 자'와 '수혜만 받는 무책임한 자'로 정치학적 이분화시켜 공동체의 연대 기반을 허물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존립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그것은 이런 전략이 일종의 계층적 적대감 조성을 통해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므로, 결국 극단적 이념 대립과 정치 혐오를 부추기고 민주주의의 정상 작동을 방해하게 된다.
둘째,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는 더 위험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표를 얻기 위한 그 어떤 정책도 문제’라는 식의 막연한 부정어로 통용되기 시작하면, 시민사회 전반에서 정책 비판이 아닌 ‘정책 혐오’가 퍼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필요한 복지 정책이나 지역균형 발전 전략조차 ‘표퓰리즘’이라는 오해 속에 설 자리를 잃는다. 결국 사회 전체의 정책 토론 수준이 낮아지고, 정당 간 견제 기능도 사라진다. 나아가 무책임한 공약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조차 '포퓰리즘'으로 몰리는 현상을 이용한 정책 사기꾼이 등장하게 된다. 즉 남녀갈등 조장과 같은 교활한 전략을 사용하는 잔인한 사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풍조는 정치 전반의 신뢰를 붕괴시키고, 정당과 유권자 간의 건전한 신뢰 관계를 위축시켜, 회복 불능의 구조적 파괴를 불러온다.
정치권은 물론 언론과 시민사회 모두가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를 쓸 때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말 한 마디가 어떤 사회적 낙인을 찍고, 어떤 정책을 무력화하며, 궁극적으로는 누구의 목소리를 지우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정당한 복지를 위한 정책을 ‘포퓰리즘’으로 몰아세우는 행위야말로 진짜 위험한 정치이며, 그것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반(反)민주적 포퓰리즘이다.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포퓰리즘 비난의 이중성과 전략성이다. 결국은 재앙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때, 그 놈은 이민을 가겠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