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길에서 쉽게 마주치는 범인(凡人)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외교관이었고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반기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반기문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동아 2월 호에 반기문 이사장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살펴보게 됐다. 제목은 “한국처럼 정치가 국민을 분열시키는 나라는 보지 못했다.”였고, 평소 필자도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라 자연스럽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하 ‘이사장’직함은 제외합니다.)
대략 고개를 끄덕이며 글을 읽어 내려가다 한 문장에서 시선이 고정되며 멈추게 됐다. 기사의 3분의 1쯤 되는 지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북한이 미사일 도발에 나선 상황인데 종전 선언서에 서명하는 게 무슨 의미 있나. 지금까지 남북기본합의서부터 9·19 선언까지 남북 간에는 크고 작은 합의가 많았다. 그런데 합의 때 잠시 분위기 반전에 도움이 됐는지 몰라도 북한이 일방적으로 합의를 깨거나 지키지 않아 아무 소용없게 됐다.” 신동아 2월 호 中
제목에서 전달되는 반기문의 생각은 지극히 중도적이거나 혹은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다. 물론 기사의 제목을 반기문이 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조금은 고려하더라도 말 중에 그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면 그것은 반기문의 책임이라고 봐야 한다.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자는 것이 아니라 종전 선언서에 반대하는 보수 정치권은 무슨 모습이고, 미국의 보수 정치권 조야에서 종전 선언서에 반대하는 의견이 꼬리를 물던 것은 또 무슨 일인가?
북미 간 종전 선언서 작성을 국제적인 뉴스로 만들면 이전까지의 여러 합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 된다. 이제 종전을 선언했는데 대륙으로 나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고, 남북 교류를 막을 수도 없으며, 미국 문화라고 배척할 수도 없다.
휴전선이라는 광대한 철책도 필요하지 않아 활용하기 따라서는 남북 양측에 엄청난 재화를 안겨줄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도 가능하다. 종전 선언서는 이렇게 짧은 몇 마디 말로 끝낼 수 없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변화가 만들어지게 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기초석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반기문의 말은 황당해 보였고 그의 주장 순수성을 의심하게 했다. 또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는 평화를 위한 종전 선언서를 막아야 할 무슨 이유가 있었다라고 판단되어 불쾌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였지만, 기사 제목에 나온 부분을 확인해야겠기에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다. 곧 그 부분이 나왔다.
“민족이나 종교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거나 지도자의 부패나 무능이 문제가 되는 나라는 많아도 우리처럼 정치가 국민을 극단적으로 분열시키는 나라는 보지 못했다”며 “국민통합과 국민화합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인터넷 댓글”이라고 지적했다. 신동아 2월 호 中
정치가 국민 분열을 극단적으로 만든다고 하더니, 그게 인터넷 댓글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드루킹을 예로 들며 “악성댓글을 통한 여론 조작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말을 했다.
이게 무슨 연결인가?
갑자기 국민 분열이 인터넷 댓글 때문이라는 진단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앞에서 정치가 국민 분열을 극단적으로 만든다고 한 말의 시작으로는 영 갈피를 잡기 힘들다.
이 부분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표현한다면, <악성댓글을 통한 여론조작>이 아닌 댓글 조작이 나쁘다고 했어야 옳다.
왜냐하면 댓글 조작은 그게 악플이거나 선플이거나 다 나쁜 짓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플 형식의 댓글 조작은 의도를 숨긴 교활함이 있어 질적으로는 좀 더 악성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후보가 공금을 사적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을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으로 포장한 선플 작업을 하면 괜찮은 게 아니지 않은가.
댓글 조작은 그게 악성(惡性)이어서 문제가 되고 선성(善性)이어서 봐줄 만한 개념으로 나눌 수 없는 사안이다.
그래서 다시 이 인터뷰의 전반을 점검해보니, 필자가 글을 읽은 것은 4월 3일이었던 반면 기사가 작성된 시점은 1월 31일로 선거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니까 반기문은 이사장 명예를 활용한 인터뷰를 통해 윤석열을 도우려는 마음이었던 셈이다.
씁쓸했다.
차라리 거창한 말이나 하지 않았다면, 흔한 정치 철새들이 모종의 도움을 받기 위한 작업이라고 하겠지만, 반기문이라면 딱히 불편한 욕심을 낼 나이도 아니고 자기 이름을 딴 ‘반기문재단’의 이사장까지 맡아가며 운영할 정도로 명예도 쌓은 인물인 것에서 더욱 그랬다.
나라의 어른 소리를 들어야 할 원로의 모습으론 실망이 아닐 수 없다. 국민들은 누구를 믿고 미래를 봐야 할지 난감한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