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탈북하면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은, 자유와 인권을 내세우는 대한민국이 스스로 내건 원칙과 충돌한다. 어제 발생한 재입북 시도 사건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판단을 국가가 대신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운다. 자유로운 선택이 없는 자유는 허울일 뿐이다.
우리는 매년 북한에 대북전단(삐라)을 날렸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장점을 강조한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정보, 즉 '한 번 남한으로 오면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고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남한이 북한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을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는다.
북한이 국민에게 진실을 감추고 외부 세계를 악마화하듯, 우리 역시 탈북자에게 우리의 실상을 숨기고 ‘천국’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삐라나 대북 송출 방송에, 남한 사회는 '하루 38명의 자살자가 있다'는 내용도 미리 고지했어야 하지 않을까?
어제 한 30대 탈북자가 훔친 버스로 통일대교를 건너 북한으로 돌아가려다 체포됐다. 그런데 이 사건은 ‘불법’이라는 사회면 잣대로만 다뤄서는 안 된다. 왜 어떤 이들은 남한 사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이 질문이 우리에게 던져져야 한다.
다수의 탈북자 삶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하다. 언어는 같지만 문화는 다르고, 경제적 성취의 동기도 다르고, 편견은 깊다. ‘자유를 찾아왔으니 여기서 만족하라’는 듯한 시선은, 오히려 그들의 고립을 강화하는 감옥일 수 있다. 그리고 귀환할 수 없다는 것은 그 감옥에 비치던 한 줌 햇볕조차 차단한 것과 같다.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사회, 그런 현실을 자유 세계라고 말할 수 없다.
‘한 번 탈북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은, 자유를 표방하는 국가가 개인의 삶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모습이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통제를 비판하며, 국민에게 진실을 숨기고 이탈을 막는 체제를 비난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자유’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향을 선택할 권리조차 부정한다면, 그것은 통제와 다를 바 없다.
일각에서는 ‘안보’와 ‘정치적 악용’을 이유로 귀환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상대 체제의 통제를 비판하면서, 자국의 통제를 정당화하는 이중잣대로 이어질 수 있다. 북한이 탈북자를 총살하거나 수용소로 보내는 것을 안보상의 조치라고 부르지 않듯, 남한이 귀환 희망자를 무기한 억류하는 것도 인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혹시 탈북자를 ‘체제 대결에서 성공한 국가’의 전리품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봐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이 체제를 외면하고 돌아가고자 할 때, 그 선택 역시 존중하는 것이 성숙한 체제의 모습이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탈북이 '선택의 실수'로 드러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야말로 체제 실패를 자임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귀환 희망자에게 ‘너의 선택은 틀렸다’라고 말해선 안 된다. 자유란, 들어오는 문뿐 아니라 나가는 문도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더 세련된 방식의 통제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