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 폐지론, 정의의 최소 선(善)을 허물자는 주장이다

작성: 이준엽 | 게시: 2024-06-15 | 수정: 2025-05-23

최근 금융감독원장이 공개 석상에서 “배임죄는 폐지하는 것이 낫다”고 언급해 논란이 일고 있다. 그는 “삼라만상을 다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는 배임죄는 현행 유지보다는 폐지가 낫다”며, 손해가 발생했더라도 민사소송을 통해 해결하면 충분하다는 주장을 폈다.

그럴듯해 보인다. 사적인 분쟁은 사적으로 풀자는 논리는 언제나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이다. 그러나 이 주장의 본질은 공적 영역의 책임을 사적 분쟁으로 치환하겠다는 위험한 접근이다. 특히 배임죄는 소액주주 보호라는 법치주의 최후의 보루다. 이를 폐지하자는 것은 법이 가장 취약한 계층의 편에 서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금감원장은 선진국 다수에서 배임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이 역시 절반의 진실이다. 예컨대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배임죄라는 조항은 없지만, ‘신의성실의무(Fiduciary Duty)’를 위반하면 민사상 책임은 물론 사안에 따라 사기·횡령·공모(conspiracy) 등의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즉 형사처벌은 여전히 가능하며 강력한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대륙법 국가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독일 형법 제266조는 경영자가 타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지위에서 이를 남용하거나 의무를 위반해 손해를 입힐 경우 형사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프랑스 또한 ‘신뢰 위반(abus de confiance)’ 등의 형사조항을 통해 동일한 취지의 규제를 유지하고 있다. 형식은 다를지 몰라도, 배임 행위에 대한 형사책임은 거의 모든 법치국가에서 인정되는 보편적 기준이다.

대한민국의 형법 체계는 단지 법 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형법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질서를 유지하고,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며, 권력의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그 중에서도 배임죄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신뢰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기업 경영진이 사익을 위해 회사 이익을 침해했을 때, 그것이 민사로만 처리된다면 수많은 소액주주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늘 피해만 감수해야 한다.

기업은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광고와 공시, 보도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전달받을 뿐이다. 그 정보의 진위를 일일이 판단하고, 그에 따라 소송을 제기해 금전적 손해를 구제받는 것이 유일한 수단이 된다면, 이는 법을 아는 자만 살아남는 정글 자본주의다.

이러한 논리를 따르면, 배임죄 폐지론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새로운 사회 규칙을 제안하는 셈이다.

“기업에 투자하려면 상법 시험에 응시해야 하며, 70점 이상을 받아야만 투자 자격이 주어진다.”
“투자금은 적어도 10억 원 이상이거나, 발행 주식의 0.5% 이상이어야 경영 감시 권한을 부여받는다.”
“투자자는 바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 공인 지능 검사를 받아야 하며, 지능지수 120 이하는 투자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겨우 이따위 수준이란 말인가?

배임죄는 단지 기업인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다. 그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부당한 결정을 억제하는 억지력이 된다. 경영자에게 사적 이익을 위한 유혹을 견제시키는 마지막 선이 바로 형법상 배임죄다. 이 최소한의 장치를 없앤다면, 기업은 그때부터 주주가 아닌 오너의 사금고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형벌의 존재 이유는 사건의 의제를 제안한 ‘강한 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며, 법의 무게는 ‘약한 자’에게 기대가 될 때 정당해진다. 우리가 정의 구현을 사법에만 기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가 정의를 구현하지 않으면, 법이라도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법마저 그 역할을 포기한다면, 법치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배임죄는 폐지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선진국의 사례를 따라 더욱 정밀히 다듬어져야 할 법적 장치다. 형법은 정의의 최소 선(善)이며, 그 최소 선(善)을 허무는 순간, 우리는 정의가 실종된 사회를 목도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