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토 사무총장의 상상력과 자유진영의 가면극

이준엽 | 게시: 2025-07-07
"시진핑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그는 푸틴에게 전화를 걸어 나토 국가들을 공격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의 이 발언은 세계 주요 언론을 통해 전파됐다. 그리고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근거도 없이 저런 수준 이하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고 그걸 알면서도 보도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따위 가면극을 봐줘야 할까?

뤼터는 나토 사무총장이며, 그 직책은 그저 한 명의 군사 전문가가 아닌, 전체 자유진영의 군사적 정당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런 자가 "내 느낌엔 그럴 것 같다"는 식의 발언을 세계 언론을 통해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이것은 실언이 아니라 계산된 무책임이고, 뻔뻔함이다.

언론이 함께 쓰는 각본

뉴욕타임즈는 이 무책임한 발언을 실었다. 그리고 마치 책임을 회피하듯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명목으로 허위와 예단, 그리고 공포를 전달하는 도구를 자청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언론의 책임은 뉴욕타임즈의 "근거 없다"는 정도로 면책되지 않는다. 이미 판단에서 그 말이 대상을 특정한 음모론이 분명한 것엔, 보도를 해주면 안 된다. 단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다른 말로 무책임이다.

책임 있는 언론은 그 말이 공적 영역에 미칠 파장을 따져야 할 책임이 있다. 이미 해당 내용은 한국 언론에 의해 복제되어 포털의 헤드라인에 올라간 상황이다. 광고를 위해 혹은 다음 인터뷰를 따내기 위해, 이런 무절제한 발언을 주요 기사로 실어 주고 타전해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시대'가 됐음을 말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 사회의 책임이란 명제가 ‘선택적’으로 행사된다는 점이다. 반대 진영의 말은 철저히 검증하고, 자극적 발언에는 해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오늘 나토 사무총장처럼 자유진영 내부의 거물급 인사가 툭 내뱉는 말은, “근거는 없지만”이라는 알리바이 한 줄로 면죄부를 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염된 정보 유통 방식이다. 언론이 아닌 면허받은 스피커들만이 작동하는 기계적 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만약 좌파 스피커격인 뉴스 공장 사장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면?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과 가까워질 것 같으니, 한국 우파 세력 일부가 미군의 지원 하에 경상도 군인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

당연히 국가적 망언이라며 온갖 규탄이 쏟아졌을 것이다. 언론이 공격하고, 시민단체가 고발하며, 정치권이 들끓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급의 발언이지만 뤼터는 다르다. 그는 우파 진영의 ‘정상적 화자’로 포장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뱉는 '허위'는 전략적 통찰로 포장된다. 이 시스템에서 우리는 어떤 ‘공정함’도 기대할 수 없다.

정말 몰랐을까?

뤼터가 저 말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몰랐을까? 뉴욕타임즈가 저 문장을 실어버리면 세계 곳곳에서 어떤 효과로 연결될지 몰랐을까?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이른바 ‘자유진영’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윤활유처럼 통과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 착한 말, 그 포장된 단어들 안에 강제된 동의, 비판의 무력화, 그리고 야만의 면허가 들어 있다.

이제 가면을 벗을 시간이다

자유 진영의 ‘착한 척’은 이제 신물난다. 비판자에게는 항상 온순한 언어를 요구하며, 스스로는 상상력과 추측이라는 무기 아래 더는 교활하기 힘들 정도의 방법으로 상대를 짓밟는다. 우리는 그런 말들이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 왜곡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그림자 속에서 사라지는지를 보아왔다.

“서방이 말하니 맞다”도, “중국이 말하니 틀리다”라는 말도 배척돼야 한다.

자유는 존중하고 지켜져야 하지만, 자유진영의 교활함은 감싸주면 안 된다. 그릇된 우리 편 의식 결과는 지금 우크라이나를 통해 보고 있다. 그들의 광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배척할 것은 분명한 어조로 배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