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무가지로 배포되는 생활정보지가 서울 시내에 처음 등장했을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대략 두 가지 이유였다.
첫 번째는 어떻게 '내가 이런 종류의 정보를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을까'였다.
부동산 중개업 협회에서 요청하지 않았어도, 생활정보지를 통한 부동산 직거래 폐해가 줄이어 소개되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생활정보지를 이용한 각종 사기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고, 나중엔 생활정보지 배부함이 불법이라는 기사까지 내보내며, 정부의 단속을 요구하는 지경으로까지 내몰렸다.
언론사의 막강한 힘을 외면할 수 없는 정부가 법을 앞세워 단속하기 시작했지만, 생활정보지가 가진 국민 편의성이 너무 커 결국은 배부함의 양성화로 정책이 바뀌게 됐다.
그러자 신생 생활정보지들을 공격하던 기성 언론들이 이번엔 자매지 형식을 빌려 너도나도 동종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결국 생활정보지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지만, 사람들은 기존의 길거리 배부 방식 원조 생활정보지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들 생활정보지 업체들은 각 지점에 자체 인쇄 기계를 갖추고, 최대한의 자율적 운영이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신문사들이 예전에 하던 대로, 한 곳에서 인쇄하고 자체 운송망을 이용해 전국으로 배부하는 비효율로 생활정보지들을 이길 수 없었다.
또한 가격 대비 광고 효과에서도 오히려 기성 언론들이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택배업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었고, 식당‧소매업 같은 토착 업체들의 경우 인근을 커버하는 지역 생활정보지가 오히려 더 높은 광고 효과로 이어졌다.
결국 뒤늦게 뛰어든 기성 언론들의 생활정보지 사업은 모두 폐업했고, 소규모의 지역 생활정보지들도 사라지며 초창기 설립 멤버였던 교차로, 벼룩시장, 가로수의 3개 업체가 각축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남은 생활정보지들도 스마트폰의 발전과 함께 규모가 대폭 축소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
영원할 것 같던 생활정보지들을 밀어낸 주인공은 뜻밖에도 네이버의 중고거래 카페였다.
무가지인 생활정보지가 구매자를 타깃한 시장 환경이었다면, 네이버 중고거래 카페는 판매자 중심의 시장 환경인 동시에, 구매자들의 흡입력도 함께 갖춘 절대 강자로 탄생했다.
나날이 편리한 기능을 탑재하며 출시되는 스마트폰의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망의 발전은 ‘당근’, ‘번개’, ‘다방’, ‘직방‘과 같은 또 다른 신규 업체의 진입을 허용하기 시작하며, 이제 생활정보지들이 누렸던 과거의 영화는 기대할 수 없게 됐다.
한창기 서울 서남부 지역 '가로수' 지점장으로 3년 간 근무했던 박OO씨는 “스마트폰이 모든 걸 가져가고 있어요. 생활정보지뿐 아니라 이제는 식당들도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망하잖아요.”
그는 생활정보지 사업이 축소되면서 지점장을 그만둔 후 서대문에서 식당업을 하고 있다.
기사를 끝낸 북두문학 기자의 모니터 원고에는 진한 아쉬움과 백색의 두려움이 남았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편리해진 세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언젠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두 번째 가치로 만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2070년의 어느 날 김OO씨는 한 통의 쪽지를 받는다.
“오늘 식별번호 N-1234567님의 정액을 채취하는 날입니다. 정해진 시간까지 채취장에 도착해야 하며, 어길 시 불필요한 관리 요소를 제거하는 화학적거세 대상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법은 2065년 제정된 인류배양법 제 365조의 ’임신 기계에 신선한 정액을 공급하기 위한 인간 남자의 노력‘에 따른 것입니다.”
2065년은 중점관리대상으로 지정되어 세금을 낭비하는 인간들을 불필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는 AI 국회의 만장일치 판단이 내려진 해였다.
[이준엽]
지금 10대와 20대는 물론 30대 초반까지도 편지와 관련된 인문학적 추억이 전혀 없다고 들었다.
연령대는 달라도 그들과 인터넷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편집자 역시 그 말에 충분히 수긍이 가지만, 혹시 싶어 주변의 젊은 친구들에게 편지나 전보와 관련된 어떤 추억이 있냐고 물었다.
대답은 상상했던 것 보다 충격적이었다.
“태어나서 여지껏 우체국에 가본 적도 없어요.”
“편지요? 편지는 학교 숙제로 위문 편지 써본 게 전부입니다.”
“학교 다닐 때, 우체국 견학이 없어서 이용법을 잘 몰라요.”
내용이 빤히 드러나는 엽서를 사용해 본 적은 있을까라는 질문은 아예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요즘처럼 개인정보가 중요한 시대에, 내용이 훤히 드러나는 엽서에 글을 넣어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일 테니까 말이다.
편집자는 펜팔 세대다.
멀리 해외로는 캐나다에 살고 있던 어떤 여학생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고, 국내에서는 경상도 어느 시골에 살고 있다는 낯모르는 여성과 설레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물론 학창 시절의 이야기고 남은 증거물도 없다.
대학 시절에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모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숨겨야 할 아픈 사연이 있어, 그때를 생각하니 지금도 울적한 마음이 든다.
고모부께서 돌아가실 때, 나를 보고 싶어하셨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나 역시 고모부께서 찾을 것을 짐작했지만, 갈 수 없었다.
내가 작은 원망을 받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큰 안도가 되기 때문이다.
군 생활 시절에는 학생들의 위문 편지를 받았지만, 그때도 위문 편지는 학생의 의무 사항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하는 등의 소위 ‘뻘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동기 중 한 명이 연결해준 충청도 어느 곳의 여성과 또다시 설레는 마음의 편지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대학을 졸업한 세대지만, 전화기는 집집이 있던 시절이라 전화로 입사 통보를 받은 기억이 있다.
전화가 귀했던 내 앞의 세대들은 모두 우체국 전보를 통해 합격 사실을 통보받았다.
편집자가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냈던 때가 90년대 초반이었다.
유럽에서 아내에게 보낸 엽서들이다. 집 안을 뒤지면 어디선가 나올 법도 한데 정성이 미치지 못해 찾지 못하고 있다.
그때까지도 우리들 세대는, 남태평양 외딴 섬의 모아이 석상처럼 누군가가 나에게 전달해주는 어떤 메시지를 기다렸다.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 대문 우편함을 살피는 것은 기본 중 기본이다.
그러니까 편집자도 마지막 엽서를 사용한 때가 이미 30년 전인 셈이다.
요즘의 우편함에는 반갑지 않은 소식들이 쌓인다.
대부분 돈을 내라는 것이거나, 자기네 물건을 사라는 광고물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의 코 푼 휴지나, 변태 짓이 의심되는 뭉치가 들어 있을 때도 있다.
거리의 빨간 우체통도 거의 사라져 어쩌다 보게 되면 엣 향수가 떠오른다.
우체국은 여전히 편지와 소포를 취급하지만, 창구의 절반 이상은 금융 업무를 담당하는 공간이 된 지 오래다.
요즘은 시중 은행들이 자신들의 축소되는 영업점을 대신해줄 창구로 우체국과 협업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고 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최초의 한국인 이름으로 명명된 연방정부 건물 ‘도산 안창호 우체국’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LA 한인 사회의 노력으로 명칭을 다시 유지하기로 합의됐다는 소식도 있었다.
우체국을 없애는 결정이 그렇게 쉽다는 것은, 우체국이 상징하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가교의 기능이 그만큼 약화됐다는 방증이다.
과거 같으면 우체국을 없애는 일이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국은 인구가 3억 3천 5백만 명이나 되는 세계 3위의 인구 대국이기에, 한국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가 아니다.
인구의 2%인 6백 6십만 명만 우체국을 이용해도 지속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를 구축한 한국은, 불과 30년 전의 기억도 까마득한 멋 옛날의 일인 듯 잊혀지고 있다.
사회가 변하는 만큼 사람들도 변해, 이제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는 우정이나 사랑도 사라졌다.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이제는 불편함을 주고 받는 사회적 도구가 된 우편함을 지나치다 잠시 멈췄다.
온갖 요구 사항과 도통 반갑지 않은 소식들만 들어찬 우편함에서, 노인 한 분이 고지서로 보이는 우편물을 꺼내 들었다.
주름진 손등만큼이나 찌푸려진 미간이 그 우편물의 요구 사항을 짐작하게 했다.
[이준엽]
북두문학
고려말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와 소와 말을 너무 잡아먹어 농사에 쓸 우마가 부족해지자, 소와 말의 도살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 이를 관리할 관청으로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했다.
법이 엄격해 소를 잡아 먹은 자를 사형에 처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에서는 금살도감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지만, 소를 잡는 것은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국가의 허락 없이 소를 잡아 먹은 죄를 물어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관할 관청의 명칭이 '금우도감'이나 '금마도감'이 아닌 '금살도감'인 것은 당시의 분위기가 '금살'이라고만 표시해도 당연히 소나 말을 잡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이해됐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진다.
즉 조선 사회 전반에 소와 말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내내 소고기를 먹지 못한 것은 아니다. 명절 때는 예외적으로 수요를 예측해 소를 잡을 수 있게 했는데, 그 양이 항상 부족하니 온갖 꼼수들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의 文人(문인) 柳晩恭(류만공)이 남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전한다.
"명절이 다가오니 도처에 다리 부러진 소가 많기도 하구나.“
도축이 허가된 소의 마릿수가 부족하니, 멀쩡한 소의 다리를 부러뜨려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소라는 판정을 받고 도축을 할 수 있게 한 셈이다.
그럼 돼지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을까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민간에는 돼지고기가 사람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전파되어 있었다.
19세기 초에 만들어진 <閨閤叢書(규합총서)>에 돼지고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돼지고기는 本(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風(풍)을 일으키며 蛔蟲(회충)을 생기게 하고,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해롭다.‘
그렇지만 그 보다 앞서 만들어진 동의보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돼지고기의 성질이 서늘하기 때문에 마늘, 양파, 고추, 부추, 대파 등 성질이 따뜻한 식재료와 함께 섭취하면 좋다“
두 책의 내용이 다른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동의보감은 전문서적이라 일반인들이 접할 수가 없었고, 규합총서는 요즘으로 따지면 민간 생활 백과사전이다.
유추해 볼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에서는, 돼지고기가 몸에 해롭다는 것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규합총서가, 이전의 지식들을 집대성한 민간생활 백과사전의 개념으로 19세기에 만들어진 책임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된 데는, 돼지 사육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의 공급이 쉽지 않은 탓이 원인으로 분석된다.
소나 말은 꼴(풀)을 먹는 가축이라 사육에 어려움이 없지만, 돼지의 경우 식량에서는 사람과 경쟁적 관계다.
결국 기근이 일상화 된 전근대 사회에서 돼지 사육을 장려하기는 어려웠다고 보인다.
사람과의 식량 쟁탈전에서 돼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분 섭취뿐인데, 당시 인분은 작물의 중요한 거름이었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돼지는 그 왕성한 번식력에도 불구하고 사육 두수를 늘리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또한 사람과 소의 배설물과 달리, 돼지똥은 거름의 품질이 낮은 것도 돼지 사육에 대한 사회적 배제에 도달하기 쉬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규합총서에서 돼지고기에 부정적인 기술은,이러한 현실이 반영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결국 가장 많이 먹는 육류는 법으로 통제되지 않는 닭이나 개고기였을 것이고, 소고기는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갈망의 대상에 있었다.
조선시대 기록들 곳곳에서, 소 밀도살과 관련된 부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부분들의 반영으로 해석된다.
그런 사실을 대변하는 공식적인 문화로 조선시대 난로회(暖爐會)가 있다.
난로회는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불을 피워 소고기를 구워 먹는 풍습을 이르는 말이다.
국가적으로 소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이 따로 있던 것이고, 음력 10월 초하룻날이면 그해의 농사가 끝나 당장은 소가 필요하지 않은 시기인 것이다.
겨우내 쇠죽을 먹일 소는 남겨 놓고, 나머지를 잡아먹은 것으로 보면 된다.
동국세시기에 난로회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요사이 서울 풍속에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燔鐵(번철)을 올려놓고 肉炙(육적)을 기름과 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 等에 조리하여 구우며 화롯가에 둘러 앉아 먹는다.'라며, '이를 '난로회'라 한다.
소고기를 그냥 먹지 않고 양념에 재워 놓고 먹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달걀은 음식의 내용을 더 푸짐하게 하기 위한 재료였을 테고, 나머지 재료들을 보면 바로 불고기를 만들어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에서 불고기의 원조가 일본이라는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내용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소불고기 요리는 원조가 있는 개념이 아니라, 일본은 일본의 방식으로 조선은 조선의 방식으로 각각 발전한 자연발생적 음식 문화일 뿐이다.
[이준엽]
개가 자기 발을 핥는 이유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이제 초보 반려인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반려인이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모두가 전문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매년 수십만 명의 새로운 반려 인구가 탄생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 글을 만들었습니다.
개가 발을 핥는 행위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볼 부분은, 편안한 그루밍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표정이나 움직임으로 자연스러운 그루밍으로 보인다면,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발을 핥는 모습이 좀 세찬 느낌이 들거나, 잘근잘근 깨무는 듯한 모습이라면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건 발을 다쳤을 수 있다는 징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개는 인간처럼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집 밖에서 작은 상처를 안고 들어오기도 하거든요.
혹은 벌레에 물렸을 수도 있고 드물게는 화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이건 반려인이 세밀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습니다.
또 특정한 음식이나 사료를 먹었을 때 발을 핥는 게 반복된다면, 그것은 알레르기라고 봐야 합니다.
개도 사람처럼 특정 성분에 알레르기를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분리불안과 관련한 증세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쉽게 알아 채기 어렵죠.
대부분 반려인이 없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니까요.
이때는 반려인과 분리되어 홀로 있을 때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등을 보완해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그다음 개의 발과 관련되어 반려인이 조금 관심을 기울인다면 기생충과 관련된 이해입니다.
개는 필수적으로 신발 없는 네발로 걷고 뛰기 때문에, 집 밖 도로나 흙바닥에 있는 기생충 등의 감염원에 쉽게 노출됩니다.
아마 개를 키워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예방이 불가능한 부분이죠.
개는 하필 다른 개의 체취?가 남은 흔적에 꽤 관심 있어하거든요.
그렇다고 나갔다 올 때마다 목욕을 시킬 수도 없고요.
결국 반려견에게서 기생충은 피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적당한 간격으로 구충제를 먹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합니다.
다만, 개는 신발 없는 네 발로 땅을 밟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정도가 좋겠네요.
[북두편집부]
아침 식사를 생리학적으로 보면, 단식을 끝내고 하루에 필요한 적당한 열량을 보충하는 개념이다.
즉 오늘을 시작하기에 가장 중요한 출발인 셈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전깃불이 발명되면서, 인간의 밤 시간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전깃불이 없던 시절, 저녁 8시가 되면 취침에 들어가고 새벽닭이 울면 하루가 시작됐던 삶이 망가지기 시작하면서, 질병의 종류도 바뀌게 됐다.
새롭게 증가하기 시작한 질병의 대부분은, 밤 시간의 활동 증가로 인해 아침을 건너 뛰는 좋지 않은 습관에서 출발한다.
과거와 달리 전깃불로 밝아진 실내는 무언가를 먹는 손쉬운 탐욕에 빠지며, 아침까지 이어진 포만감은 아침 식사를 건너 뛰는 결과로 연결됐다.
그러나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은, 고콜레스테롤과 심장병 및 제2형 당뇨병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많은 연구가 축적되고 있다.
또 너무 적은 양의 아침 식사는, 추후 높은 칼로리의 갑작스러운 보충으로 이어지며 체중 증가의 주 요인이 된다.
이렇게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이, 아침에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하는 습관이다.
단백질은 체내 분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뭔가를 먹고 싶은 욕망을 최대한 늦출 수 있다.
하지만 소시지 같은 가공육을 아침 식사의 단백질원으로 하는 것은 지양하는 게 좋다는 게 중론이다.
또 단백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것은 썩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한다.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골고루 섭취해야 균형잡힌 신체리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에 가장 나쁜 행위 중 하나는, 무언가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먹는 나쁜 습관이다.
마지막으로 지방을 섭취하기에 가장 좋은 때가 아침 식사 시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면, 자신의 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북두편집부]
무나물 비빔밥은 어릴 적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 중 하나인데, 이 음식의 특징을 규정하라고 하면 아마 이렇게 표현해야 할 것 같다.
'무나물 비빔밥은 유명하지 못한 한국 전통 음식이다.'
나는 무나물 비빔밥이 과거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었던 일반 음식 종류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지금 우리가 ‘비빔밥’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빨간 고추장이 들어간 비빔밥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방에서 비롯된 음식으로, 그 연원이 짧다.
고온성 채소인 탓에 조선 후기 남부지방의 특산물로 재배되기 시작한 고추(당시에는 고초(苦草)로 표기)는 우리나라에 전래된 때가 임진왜란 후로 추정되며, 고추장은 그로부터 100여 년 뒤 실체가 드러난 발명품이다.
그런데 비빔밥은 그 전부터 기록으로 남아 있고, 실제적으로는 최초 기록 훨씬 전부터 우리의 일반적인 취식법이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비빔밥의 역사 기록으로는 조선 초기 ‘골동반’, ‘혼돈반’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됐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단어들은 중국식 조리법을 표현한 것이라 비빔밥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고도 한다.
하지만 1810년의 몽유편 골동반 부분을 보면 그 밑에 브뷔음(‘비빔’의 옛 고어 표현)이라고 한글 독음이 충실히 기록되어 있어, 비빔밥이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음식의 형식에 바탕해 명칭만을 공유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중국에는 우리 식의 비빔밥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비빔밥 문화는 철저하게 숟가락이 일상화된 음식 문화에 친근한 요리이기에 중국인들의 음식 습속에서는 탄생할 수가 없다.
더욱 다행인 것은 한글 표현으로 처음 등장한 1810년의 몽유편 ‘브뷔음’을 시작으로 ‘부뷔음’ 그리고 시의전서 속에서 ‘부빔밥’ 등으로 표기가 나오며 오늘날 ‘비빔밥’이란 명칭으로 정착되는 과정이 여러 문헌을 통해 제대로 기록된 점이다.
이 정도면 비빔밥 종주국 타이틀을 자랑해도 괜찮지 싶다.
한글로 등장하기 전의 유력한 표현인 골동(骨董)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오래되고 희귀한 옛 물건’을 말하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들이 한데 섞인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비빔밥의 형태를 설명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보면 생선과 채소를 섞은 밥을 ‘혼돈반(混沌飯)’이라 표기하고 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霖曰。惟公命耳。遂以飯一盆。襍以魚 菜。如俗所謂混沌飯。酒一角杯可容三壺者 饋之。霖乃數匙而盡其飯”
여기서 잡이어채(襍以魚菜)가 ‘생선과 채소를 섞다’라는 뜻이고, 그것을 혼돈반(混沌飯)이라 명칭한 것을 볼 수 있다.
골동반(骨董飯, 汨董飯) 역시 밥에 이런저런 재료들을 섞어 먹는 방식을 의미하고, 실제 사용된 단어의 문맥에서도 유관한 음식 형태의 명칭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규경(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골동반(骨董飯)이라 하며 다음과 같이 비빔밥 종류를 기록하고 있다.
“骨董飯。菜蔬骨董飯。以平壤爲珍品。如雜骨董 飯、鯔膾鮆膾鰣膾芥醬骨董飯、鱅魚新出炙 骨董飯、乾大鰕屑蝦米屑骨董飯、黃州細蝦 醢骨董飯、蝦卵骨董飯、蟹醬骨董飯、蒜骨 董飯、生胡瓜骨董飯、油鹽炙海衣屑骨董 飯、美椒醬骨董飯、炒黃豆骨董飯。人皆嗜 爲珍美”
문장을 자세히 보면 “骨董飯(골동반)”이라 먼저 정의한 후, “菜蔬骨董飯(채소골동반) 以平壤爲珍品(이평양위진품)”이라는 말로 “채소골동반은 평양의 것이 진품(으뜸)이다.”라고 명시했다.
그리고 如雜骨董飯(이잡골동반)이라는 말로 다른 종류의 골동반이 있음을 알리고, 온갖 생선과 특히 새우는 물론 달래와 오이, 콩 등을 재료로 한 골동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으뜸으로 친 평양의 채소골동반을 제외한 나머지 재료들을 살펴보면 숭어·갈치·준치·전어·대하·새우·새우알·게장·김가루·볶은콩까지 골동반의 재료로 제시되고 있어 살짝 의아한 느낌이 든다.
의외로 미초장(美椒醬)이라고 표현한 고추장골동반은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빨간 고추장을 주재료로 한 비빔밥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비빔밥의 가장 유력한 한자어 표현인 골동이 실제 어떤 형태인지를 다른 문장에서 살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이익(1681~1763)의 성호전집(星湖全集)을 보면,
골동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지만 骨董吾無厭
배를 채우기에는 국밥만 한 것이 없다 塡腸澆饡佳
라는 표현이 나온다.즉, 골동은 국물이 없는 음식을 말한다고 판단되며 자주 먹는 음식이 된다.
다시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보면 골동반의 으뜸을 채소골동반이라고 한 것에서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비빔밥을 말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골동반이 그냥 밥과 반찬을 먹는 형식이었다면 이런 식의 표현이 등장할 수 없고, 끓여 먹는 방식이었다면 그와 관련된 묘사가 반드시 들어가게 마련이다.
‘채소골동반’ 뒤의 온갖 생선과 관련된 골동반은 아마도 현재의 우리가 전승받지 못한 어류의 다른 저장법에 기인한 사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원저자인 이규경이 말로만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을 가능성도 보인다.
특히 蝦卵骨董飯(하란골동반:새우알골동반)의 소개를 볼 때, 귀동냥을 통한 기술도 있었다고 짐작된다.
‘하란’은 비빔밥의 재료로 쓰기에 너무 고가의 음식이었고, 비빔밥의 재료로는 딱히 어울리지도 않는다.
결정적으로 서유구(1764~1845)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비빔밥을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이를 骨董飯(골동반) 또는 汩董飯(골동반)으로 혼용 표기했음을 볼 수 있다.
”謂之“社飯”. 今人用 菜茹和肉、油醬炒熟,拌和白飯,俗呼骨董 飯。社飯之制,與“汩董飯”相似,而特肉多 菜少耳”
··· ‘사반’이라 칭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채소와 고기에 간장과 기름을 넣고 볶은 후 흰 밥에 섞어 이를 ‘骨董飯(골동반)’이라고 말한다.
즉, 앞서 말했던 (사반)을 만드는 방법은 汩董飯(골동반)과 비슷하지만, 특별한 것은(다른 점은) 채소보다 고기가 많은 것이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골동반이 비빔밥을 말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다양한 기록들이 말해주는 것은 비빔밥이 상당히 많은 인구에서 회자되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또한 위의 역사 속 기록들이 말해주는 것은 비빔밥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우리의 음식 습속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판단 지표로도 작용한다.
한편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하면 탁 튀어나오는 비빔밥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한국인에게서 비빔밥은 유래를 따져야 할 필요가 없는 자생적인 음식 문화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잘 차려진 음식을 보고 “상다리 부러진다”는 표현을 사용할 만큼 많은 숫자의 반찬을 가진 음식문화 속에서, 여러 반찬을 섞어 밥에 비벼 먹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은 단품 위주의 차림이 일반적인 음식 문화였고, 그래서 젓가락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식문화였다는 것을 따져보면 이해가 쉽다.
이제 다시 무나물 비빔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 글의 주제가 무나물 비빔밥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 먹었던 무나물 비빔밥은 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시절에도 흔히 먹었던 음식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무는 재배의 용이성뿐 아니라 저장성에서도 최고의 채소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의 이유가 무나물이 달걀부침과 궁합이 좋은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반 가정에서 쉽게 조달할 수 있는 채소였던 무를 얇게 채 썰어 가볍게 절인 후 들기름에 볶고, 그 위에 달걀부침을 반숙으로 얹어 밥과 함께 비비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일반 가정에서는 무에 견줄만한 다른 채소가 없던 시절이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도대체 무와 달걀로 어떻게 맛을 만드는지 의아할 법도 하다.
나 역시 서울에 올라와 산 지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직 무나물 비빔밥을 판매하는 음식점을 보지 못했으니, 아예 들어 본 적도 없는 이들은 그 음식의 맛을 어떻게 상상하랴.
사실은 우리 집도 서울로 이사 온 후에는 무나물 비빔밥을 거의 먹지 않게 됐다.
아무래도 조금 더 자극적인 맛을 안겨주는 빨간 고추장을 넣은 전라도식 비빔밥이 훨씬 더 맛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늘 먹던 무나물 비빔밥이 곧 연중행사로 바뀌고 차츰 잊고 지내다가, 최근에 다시 그 맛이 떠올라 만들어 먹고 내친김에 아예 식당 메뉴로 뽑았다.
한 그릇 만들어 비벼 먹다 보니 무채색의 무나물 비빔밥에서 난데없이 애련한 마음이 생기고, 혹시 우리들의 기억에서 영영 사라지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이 생겼다고 핑계를 대고 싶다.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맛을 본 사람들의 후기가 가게의 명운을 조정하는 얄궂은 세상이 된 것을 신경 써야 했다.
낯선 무나물 비빔밥 때문에 애꿎게 맛없는 식당으로 찍히면 억울할 것 같아 메뉴에 주의사항을 달았다.
/// MUNAMUL WARNING /// 자극적이고 칼칼한 음식을 즐기는 분은 ([절대 주문 금지]) ///
무나물 비빔밥은 유명하지 않은 한국 전통 음식으로, 고추와 관련된 재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즉 짜고 맵지 않은 비빔밥으로, 제가 공부한 바로는 현재 대세로 굳어진 고추장 들어간 빨간 비빔밥보다 더 민간에 친숙한 음식이었습니다. 저 어릴 적 강원도에서는 자주 먹었던 음식입니다. 달걀부침은 반숙에 가깝게 나갑니다. 익숙해진 사람은 날달걀 노른자만을 넣어 먹기도 하며, 흰자위는 맛을 해치기 때문에 버립니다.
[이갑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