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재단하는 것은
김소월(金素月) 시인은 남북한 양쪽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본명은 김정식이고 소월은 그의 호였다.
젊은 나이였던 33세에 요절했는데(1934년), 짧았던 인생의 마지막쯤 소월은 몸과 마음 모두 극도의 빈곤함에 좌절했던 때로 알려졌다. 그의 시 세계 속 정서를 끄집어내 살펴본다면, 시 ‘진달내’이 만들어진 즈음과 이후의 정신세계가 극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시에서 엿보이는 형식의 완결성이 현실 세계에서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탓일 수도 있다.
또한 의식이 있는 피식민의 삶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일본인에게 매를 맞은 후유증으로 불우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된다.
친일을 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하기는 불가능했던 시기, 한국인 특유 한과 정서를 가졌던 시인의 삶은 매우 고달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필자의 20세 때를 생각한다면, 그의 시 세계는 후학들이 감히 평가하기 어려운 높은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시 속에 녹아 있는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표현 기법은 천재적이라는 표현도 모자란다.
다름 아닌 한자 부분 ‘寧邊에 藥山’이다.
‘진달래꽃’에서 ‘寧邊에 藥山’이 빠진다면 시는 맹탕이 된다. 그저 미려한 말 몇 조각 나열한 것으로 칭찬되는 수준에 그쳤을 것이 틀림없다.
시 속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가 언어의 시적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라면, ‘寧邊에 藥山’은 시의 완결성을 추출하는 데 가중치 높은 산입으로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영변에 약산’을 가 본 이 없지만, 누구도 그 장소의 떠올림을 자신의 표상에서 거부하지 않는 것이 구체적 증거다.
시인은 우리 내면의 깊은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그의 시 중 ‘진달래꽃’을 살펴보고, 시 속 표현 중 ‘즈려밟고’와 관련된 지역적 언어감 차이에서 오는 문제점을 얘기하련다.
아래 세 편의 ‘진달래꽃’이 있다.
첫 번째 (가)의 ‘진달내’은 소월의 나이 20세에 개벽(開闢)이라는 잡지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고, 두 번째인 ‘(나)’의 ‘진달내’은 3년 후 매문사(賣文社)를 통해 자신의 시집을 펴내며 수정한 작품이다.
세 번째 (다)의 ‘진달래꽃’은 소월의 사후, 스승인 김억이 일부 교정 발표한 작품이다.
-- (가) --
진달내(民謠詩)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말업시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寧邊엔 藥山
그 진달내을
한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길 발거름마다
려노흔 그을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흘니우리다.
開闢 2주년기념호(25호, 1922.7)
-- (나) --
진달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藥山
진달내
아름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시집 『진달내』 (매문사, 1925)
-- (다) --
진달래꽃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분히 지레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억 편(編), 『素月詩抄.1939년』
우선 해결돼야 하는 부분은 (가)와 (나)에서 어느 것을 ‘진달래꽃’ 정본으로 봐야 하는지의 문제인데, 이건 당연히 작가 자신이 고쳐 쓴 (나)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 무엇보다 시감(詩感)에서 (나)가 더욱 완벽하다는 것을 외면할 이유가 없다. 또 여러 부분이 고쳐졌어도 시적 의미가 바뀌지 않은 것에서, 소월의 각별한 관심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후학들은 (가)와 (나) 혹은 또 다른 판본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이 소월의 손길을 거친 것이라면, 그중 가장 완벽한 시감을 가진 작품을 정본으로 보면 된다.
그때는 한글 표현에 대한 정확한 새김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기 때문에, 일부 표현이 달라진 것에 집중해 시를 달리 평가한다면 잘못된 접근이라고 본다.
이렇게 보자.
191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국어(國語)는 일본어를 교육하는 책이다. 한국어는 ‘조선어’라는 명칭을 가지고 지금의 제2외국어처럼 다른 교과서에서 다루던 시절이다. 나중에는 조선어 과목도 사라졌다.
다행스럽게도 몇몇 학교는 일제에 의한 병합 전에 세워졌는데, 정주의 오산학교와 평양의 대성학교가 그렇다. 대성학교는 설립자인 안창호 선생의 망명과 함께 1회 졸업생을 끝으로 사라졌지만, 오산학교는 폐교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대의를 위해 1926년 일제의 정규 과정에 편입하게 된다.
김소월의 오산학교 입학은 1915년으로, 조선인 교사들로 구성된 오산학교는 교과 가르침에서 약간의 융통성이 존재했으며, 소월이 김억의 지도하에 시 학습을 한 과목은 ‘작문’으로 알려졌다.
즉 당시의 표현으로 ‘조선어’인 한글 관련 맞춤법 체계는 이제 막 걸음마 단계 수준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소월이 시를 쓰던 시기는 이러한 혼란이 가장 심했던 때다. 그래서 소월의 시 ‘진달내’이 실렸던 開闢 2주년기념호(25호, 1922.7)를 지금 읽으려면 쉽지 않다.
김옥균 등이 1세대 선각자, 안창호 등이 2세대 선각자였다면, 소월의 작문 스승이었던 김억은 조만식 등과 함께 3세대 선각자 그룹에 속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 혼란상은, 1세대 선각자인 김옥균이 1894년 능지처참 된 21년 후인 1915년 김소월이 오산학교에 입학했다는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격변기의 와중에 ‘찐우리말’ 시 ‘진달내’이 탄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소월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진달래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김소월의 시에서 살펴봐야 할 부분은, 소월 자신이 손 보지 않고 김억이 임의 교정한 (다)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부분으로 국한해야 하는 이유다.
스승인 김억의 교정본 ‘진달래꽃’이 포함된 ‘소월시초’는 소월이 사망하고 5년 후에 출간됐다. 스승으로서, 제자의 출중한 시가 자칫 낭창하지 못한 세파에 묻힐까 두려웠던 것으로 이해된다.
마침 소월과 스승 김억은 평안북도 곽산을 뿌리로 하는 같은 지역민이었을 뿐아니라, 이후로도 한동안 두 사람은 동행자였었기에 더욱 다행한 일이었다.
김억은 소월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누구보다 좋은 조건을 갖춘 적임자였다. 만약 김억의 ‘소월시초’가 없었다면, ‘진달래’은 약산으로 뒤걸음질하는 촐촐한 신세였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김억은 자신의 작문 학생이었던 소월의 시가, 격변기 과도기적 맞춤법에서의 일부 부조화를 손봐야 하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의 교정 대부분은 마치 소월 자신이 손댄 것과 진배없을 정도로 원작의 맛을 해치지 않았다. 다만 후대에서 벌어진 남북 단절의 영향이 특이한 해석을 달게 했다.
김억의 교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즈려밟고’에 대한 표기에서 다름이다. 소월은 ‘즈려밟고’를 하나의 단어로 삼았는데, 스승인 김억은 ‘지레 밟고’라는 두 음절 단어로 봤다는 점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여기서 필자는 역시 평안북도 출신으로 작고하신 이모부를 떠올렸다. 이모부께서 사용하던 말 중에 ‘지레 밟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지려밟으라우.”다.
억양이 [지]에 들어가 “지래밟으라우.”로 들릴 때도 있었고, 억양이 [지레]에 들어가 “지레 밟으라우.”처럼 들리기도 했다. 내가 그 말을 처음 들었던 때는 대학 1년생 시절로 이모부가 운영하는 택시회사 주차장에서 운전을 배우던 순간이다. 옆 좌석에 타신 이모부께서 엑셀을 밟는 설명에 “앞을 잘 보고 엑셀을 지려밟으라우.”라고 말했다.
유추하건데, ‘즈려밟고’ 혹은 ‘지레 밟고’ 모두 맞는 표현이다. 다만 ‘지려’, ‘즈려’, ‘지래’, ‘지레’의 의미가 어떤 것이냐에 다툼이 있다.
학자 중에는 명확한 뜻을 가진 ‘지레’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흔히 ‘지레 짐작하다’과 같은 사용에서 그 근거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학자는 ‘지레’를 ‘힘주다’로 해석해 ‘지레 밟고’는 ‘힘주어 밟고’라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필자의 이모부께서 이제 막 운전을 배우는 조카에게 엑셀을 힘주어 밟으라거나 먼저 밟으라는 의미로 ‘지려’를 말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필자가 청년 시절에 경상도 태생인 후배와 대화 중 큰 싸움이 벌어질 뻔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후배에게 ‘니가 내일 사 와.’라는 말을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 후배는 내 말을 듣고 갑자기 얼굴이 뻘개지면서 핏대가 솟아오른 듯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화를 참지 못하고 나에게 거친 말투로 대들었던 불편한 기억이 있다.
영문을 모르던 내가 가만히 있었기에 주먹다짐이 벌어지지 않은 정도로 평가할 만한 상황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게 ‘니’라는 표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평상시에도 ‘니’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던 필자로서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었다.
아직도 납득하기 어렵지만, 그 후배가 살았던 경상도 동리에서는 ‘니’라는 표현이 사람을 아주 낮게 하대하는 것으로, 평생에 걸쳐 한 두 번 사용도 쉽지 않다는 해명을 들었다.
하지만 필자의 고향인 철원에서는 ‘니’라는 표현이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다. 물론 나이가 많은 연장자를 호칭하는 것은 아니고, 동무이거나 동생인 상대방을 지칭할 때 흔하게 사용하는 일상어다. 외려 그에 상응하는 다른 단어는 알지 못한다.
오늘도 필자는 동생과 통화하며 ‘니가’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했을 정도로 일반적인 호칭이다. 그것은 지금 북한으로 이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 사정은 알지 못한다. 체제 특성으로 역사 해석은 물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일상의 사소한 언어에서도 사상적 검증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평안도 출신인 이모부도 자신을 지칭하는 ‘내래’, 혹은 상대방을 지칭하는 ‘니래’를 일상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래’는 단순 어조사다.
필자의 언어인 ‘니’는 ‘너’ 혹은 ‘당신’을 지칭하는 중국어의 니(你)에서 온 말이다. 즉, 그 단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중국에서도 옳게 사용되는 말이고, 우리에게 전파된 외래어 사용에서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표현이다.
최소한 강원도 철원이거나 서울까지도 말이다.
분명하게도, ‘니’라는 표현은 사람을 낮춰 부르거나 욕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지만 후배가 살았던 동리에서는 그 말이 매우 좋지 않은 의미로 인식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시는 한 국가 내에서 언어의 최상위 예술 행위다. 그래서 다른 모든 문장은 외국어로 번역할 수 있어도, 시는 번역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소월 맛집의 또 다른 메뉴인 ‘개여울’ 역시 영어의 어떤 단어로도 번역할 수 없다.
얼추 비슷한 개념을 찾았다 해도, 한 지역 안에서 수백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인문학적 감수성이 또 다른 세계에 복사되어 있기는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월의 ‘진달래꽃’ 전체를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번역해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어긋난 출발인 셈이고, 시를 해석(解釋) 학문의 세계에 강제로 욱여넣어야 밥을 먹을 돈이 나오는 교육 시스템의 비애이기도 하다.
또한 시감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 어조사형 구절을 놓고, 복잡한 해석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학식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개벽에서는 ‘즈러밟고’가 매문사本에서 ‘즈려밟고’가 된 것은, 그 표현이 시감을 위한 것이기에 변형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즈려밟고”에서 시인이 실수했거나 ‘대략’적인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아마, 다음 대목에서 그 생각은 부질없다고 여길 테다.
소월의 유일한 시작(詩作) 논문인 詩魂(시혼)에는 ‘아름답다’ 단어가 총 5회 등장한다. 그 다섯 번 중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아름답다’ 단어 正 형태는 2회 등장하고, 한자 표현으로 ‘美的價値(미적가치)’ 1회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릿답고’와 ‘아름답은’이다.
비록 소월이 인생 후반기 빈곤으로 고통받았지만, 시인의 언어 맛집만큼은 매우 풍성한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아름다움(詩魂. 소월시초 169p)
아름답은(詩魂. 소월시초 170p. 171p)
아릿답고(詩魂. 소월시초 172p)
아름다운(詩魂. 소월시초 182p)
美的價値(詩魂. 소월시초 183p)
시혼(詩魂)에서는 영어 ‘rhythm’의 한글 표기도 각기 다르게 구성했다.
그 詩想의 範圍 리즘의 變化, (시혼. 소월시초173p)
詩魂과 詩想과 리듬이 步調를 가즉히 하여 (시혼. 소월시초182p)
이렇게 풍부한 표현 의지는 시인의 단어 사용에 ‘대략’이나 ‘우연’ 혹은 실수가 개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증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소월의 논문 시혼은 현대인들에게는 난독을 일으킬 정도로 독해가 어렵다. 한문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필자의 후배에게 소월의 ‘詩魂’을 주고 요즘 시대에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바꿔달라고 했더니, 이틀 만에 포기한다고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차라리 전체가 한문으로 구성된 문장을 읽는 것이 더 낫다.”는 말까지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월이 활동하던 시기는 앞서 살펴던 것처럼 한자와 한글 병용 관련한 표기 난맥상이 그대로 노출된 문화 과도기적 시기였다.
시인의 시혼에는 2023년 기준 한중일 삼국의 字典(자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徵妙한 節操(징묘한 절조)’가 그렇다. 한자 각각을 따로 떼어냈을 때,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소월 자신만의 정신세계 속 언어가 따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관점도 가능하다.
하지만 필자가 참조한 시혼 본(本)은 소월의 師匠(사장)인 김억의 소월시초 속 詩魂이다.
{師匠(사장):학문이나 기예(伎藝)를 가르치는 사람. 학예(學藝)에 뛰어나 남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소월이 김억을 지칭할 때 사용한 호칭이다. 김억은 소월보다 6살이 많았으며 1907년 오산학교에 입학 후 1913년 일본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공부하고 1916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소월은 1915년 오산학교에 입학하고 1916년 결혼한다. 김억이 이십 세 교사로서 소월을 처음 만난 때는 소월이 열네 살짜리 꼬마 신랑이었을 때인 셈이다.}
생각해보자.
김억은 자신의 소월시초에서 소월의 시 일부를 교정 후 소개하고 있는데, 만약 ‘징묘한 절조’라는 말이 소월시초 집필 당시 사라진 단어였거나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면, 다른 말로 교정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김억은 소월시초에서 이렇게 말했다.
“『詩魂』이라는 論文은 故人의 唯一한 詩論으로서, 故人이 詩에 대하여 어떠한 態度를 가졌는가를 能히 엿볼수가 있으므로 또한 이 詩抄에 실어 놓았습니다. (시혼이라는 논문은 고인의 유일한 시론으로서, 고인이 시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가를 능히 엿볼 수가 있으므로 또한 이 시초에 실어 놓았습니다)”
徵妙한 節操(징묘한 절조)가 소월시초가 출간됐던 1939년 당시에도 사용됨은 물론 식자들에게는 무슨 뜻인지 이해되는 단어였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찐우리말’로 작성된 소월의 시적 언어감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시기 시인의 주변을 생각해보라.
우리말은 물론 한자어, 일본어, 약간의 러시아어 그리고 시혼에도 등장한 영어는 물론이요, 새로운 세상을 제시하는 각종 사상의 유입까지 짧은 새 엄청난 양의 문화가 뒤섞인 복잡한 사회상이었다.
소월은 그 혼재된 무질서 속에서 명확한 우리말을 ‘아릿답게’ 추려낸 천재 시인이었다.
시를 과도한 해석의 학문으로 접근해서는 올바로 읽을 수 없다.
素月도 논문 시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作品에는 그 詩想의 範圍 리즘의 變化, 또는 그 情調의 明暗에 따라 비록 같은 한사람의 詩作이라고는 할지라도 勿論 異同은 생긴다.』 (작품에는 그 시상의 범위, 리듬의 변화, 또는 그 정조의 명암에 따라 비록 한 사람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름이 생긴다.)
필자는 이 말이 사고의 유연성을 강조한 말로 생각된다.
영국이 불문헌법을 채택하게 된 이유도, 내용을 명확하게 정의하면 갈등이 만들어지는 주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수결의 논리나 강한 자의 힘에 맞춰 하나의 틀에 묶는 것이, 오히려 해로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불문헌법의 탄생 배경이다.
이처럼 한 국가의 헌법도 명확한 해석학적 접근이 만병통치가 아닌 것처럼, 시의 세계는 불문헌법의 예에서보다 더 관용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고인이 된 전국노래자랑의 명사회자 송해 씨가 미남이었거나 말을 잘해서 해당 프로그램의 장수 사회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소탈함, 그럼에도 절제된 태도, 준비되지 않은 실수들이, 우리 국민 누구에게서도 거부감이 없었던 데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명확한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보편적 질서로,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음식의 백반 메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식당도 백 가지 반찬을 내지 않지만, 백반이라는 말에 포함된 질서의 무게는 법보다 앞에 있는 가치를 지닌다.
그런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자세가 영국의 불문헌법이 유지되는 방법이고, 그 말은 딱 부러지듯 ‘이렇다’는 함정을 벗어나야, 비로소 시상(詩想)의 응결이 보이는 시인의 눈을 의미한다.
시는 해석으로 파헤치는 별 맛집의 세계가 아니라, 오감으로 빚어내고 받아들이는 감성 언어 맛집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만약 이 구절에서 어조사 ‘즈려’를 뺀 “사뿐히 밟고 가시옵소서.”였다면, ‘진달래꽃’은 진즉에 잊힌 시였을 테다.
[참고자료]
1.開闢 2주년기념호(1922.7)
2.시집 『진달내』 (매문사.1925)
3.『素月詩抄(소월시초).1939년』
4.한국일보:[다시 본다, 고전] 한과 슬픔을 노래한 김소월의 시는 모던했다.
5.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의 신앙과 민족운동. 한규무. 광주대학교
6.‘詩魂’은 소월시초에서 김억이 소개한 전문을 참조했다.
7.본문에 등장하는 각 인물의 연표 등은 나무위키 등을 참조했다.
배포처 : 교보문고
책 제목:소월 맛집 ‘진달래꽃’ / 저자:이준엽
[북두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