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김] 글가마 - 글이 담긴 가마니

  • 스낵씨
  •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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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끼줄을 꼬아 집으로 가져왔더니 아버지가 깜짝 놀라며 물었습니다.

  "이거 정말 니가 꼰 거니?"

  새끼줄을 보고 놀란 아버지는 칭찬보다 걱정이 앞섰습니다. 곧 아들의 손을 살펴보더니 "또 새끼줄 꼬면 안 된다."라고 꾸짖듯 한마디 하셨습니다.

  어른들도 새끼줄을 꼬지 않았던 사람이 갑자기 새끼줄을 꼬면 곧 손에 물집이 잡힙니다. 그걸 어린 녀석이 해냈으니 손이 남아나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손 아픈 것은 저에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자신감이 아픈 걸 모르게 했습니다.

  인생 첫 기술 공예 작품이라 꽤 의기양양 했었는지, 엄마한테서는 곧 이런 말도 들렸습니다.

  "우리 아들 조금 있으면 가마니도 짜 오겠는 걸?"

  그 시절 새끼줄의 용도는 매우 다양해 집집마다 일정 분량 이상의 새끼줄이 광 한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시골 생활을 하지 않았던 분들은 당연히 무언가를 묶는 데 새끼줄을 사용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새끼줄의 용도는 묶는 것 외 매우 광범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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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가마니 그림을 봐도 새끼줄이 감겨 있습니다. 마치 가마니를 묶은 것 같지만, 실제에서는 가마니를 나르기 위해 새끼줄을 더 필요로 했습니다.

  또 새끼줄의 중요한 용도는 가래질할 때입니다. 요즘 사람은 가래질이 뭔가 하시겠지만, 제가 어린이였던 1970년대까지도 농촌 들녘은 온통 가래질 천지였습니다.

  오늘은 박 씨네 논, 내일은 김 씨네 논, 그리고 우리 논까지 농번기가 되면 거의 매일 "어여차, 어여차" 가래질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논농사는 절대 혼자 짓지 못합니다. 그때는 경운기도 없던 때라 농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일이 사람과 소의 힘으로 행해졌습니다.

  가래질은 세 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데, 여기서 새끼줄은 가래를 당기는 데 사용됩니다.

  그리고 정말 대단한 것을 묶기도 합니다. 바로 지붕이죠. 그 당시 아직 새마을 운동이 보편화되지 못해 대부분의 농가는 초가지붕이었습니다.

  이 초가지붕은 이 년마다 짚단을 덮어줍니다. 그리고 새로 덮힌 짚단에 새끼줄을 두르고 지붕 전체를 묶습니다.

  무언가 묶으려면 이 정도는 돼야 묶었다는 행세 좀 하는 게 그때의 시골 새끼줄 모습입니다.

  또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지만, 몇몇 집 새끼줄은 뒷일 후 똥을 닦는 데도 사용했습니다.

  그외에도 아들을 난 집은 붉은 고추와 숯 등을 끼워 넣은 새끼줄을 문간에 걸쳐 놓고 '금줄'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 무당이 굿을 할 때도, 장례를 치를 때도 기타 마을 행사에서 돼지를 잡을 때도 새끼줄은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그러니 여섯 살배기 어린이도 새끼줄을 꼬았던 것이죠. 그리고 그 새끼줄 꼬기의 마지막 단계는 가마니와 멍석 짜기입니다.

  그 당시 농촌에서 가마니와 멍석은 거의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필수품이었습니다. 마당에 멍석이 펴지고 가마니에 쌀이 담기는 순간 세상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갚지 못했던 신세를 떠올리기도 하고, 날카로운 이해 관계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여보! 여름에 맡겨 놓은 송아지 어떻게 찾아오지요?”

  “쌀섬이나 주고 데려오도록 합시다.”

  그때는 송아지를 구매했어도 금방 가져오지 않고 집 사정을 봐가며 나중에 가져오는 일도 흔했다.

  어떤 집은 가을 쌀섬으로 장리쌀을 갚기도 하고, 또 어느 집은 장리쌀을 얻어오기도 하며, 또 다른 이는 장리쌀 놓을 자리를 알아봅니다. 마을에는 도시물을 먹은 새로운 사람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여름 내 닫혀 있던 투전판도 다시 열립니다.

  그들 낮선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들 무렵이면 명절을 준비하며 한 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이죠.

  여섯 살배기의 손에도 그새 파닥한 힘줄이 그려졌습니다.

  그때의 시골 가마니에는 농촌 마을의 정과 이해가 담겼지만, 북두문학에서는 글을 담고 있습니다. '글가마'는 그렇게 시작된 제호입니다.

  [이준엽]